
주일예배 설교
20230115(주일)
요일 1:1-10 교제(koinonia)의 기쁨
서론)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될 때, 하나님을 기뻐하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두 번째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제의 기쁨입니다. P)교제나 친교라고 하면 단체의 구성원들이 서로 친밀감을 도모하기 위해 하는 친목 활동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예배 말고 좀 더 편하게 성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식사나 레크리에이션 등을 생각하지요.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성도의 교제는 훨씬 더 깊고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P) 성경에서 교제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는 “동료 의식, 교제, 사귐, 공유, 참여, 나눔, 상호 교류, 우정”등의 폭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친해지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이상의 사람이 함께 공동의 무엇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P) 1)사람들과 교제(행 2:42, 고후 6:14, 갈 2:9)하는 것을 코이노니아라 불렀지만, P) 2)하나님의 성품에 참여(벧후 1:4)하거나 성부와 성자와 사귐(요일 1:3)이 있거나, 성령님의 교통하심(고후 13:13)을 누리기를 축복할 때에도 이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P) 3)예수님의 고난(빌 3:10, 벧전 4:13)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고전 9:23, 빌 1:6)하고,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고전 10:16)하는 일들도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P) 4)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에 참여하거나(고후 8:4) 성도들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며 소유를 나누거나(고후 1:7, 빌 4:14, 히 13:16)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경우(빌 4:14-15)도 코이노니아였습니다. 성경 속에서 교제,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참여하고 나누는 일을 가리킵니다. 오늘 이 코이노니아에 대해 함께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 다섯 개의 사역 조직 가운데 성도의 교제, 코이노니아를 담당하는 친교부가 있습니다. 친교부에는 성도들의 애찬을 준비하는 만나팀, 새가족을 환영하고 돌보는 새가족팀, 환우와 어려운 형편의 성도들을 돌보는 돌봄팀, 경조사를 챙기는 경조팀이 있습니다. 친교부에서 헌신하는 모든 사역자들 뿐 아니라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제의 의미에 대해서 잘 배우고 우리 교회 생활에 적용할 때에, 성도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어떤 것일까요? 성도의 교제는 세상 사람들의 친목활동과 어떻게 다를까요?
본론) 첫째로, 성도의 교제는 복음 증거의 열매입니다. P)1-2절 말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제자들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즉 성자 예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약속의 메시야가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 그 나라가 영광 중에 그들 중에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사랑으로 사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영생의 삶이 그들 중에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제자들의 삶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속에서 사시는 영생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나누며 전하는 복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복음을 경험하고, 복음을 전하여 성도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 세상적인 친목과 구별됩니다. 세상적인 친목은 서로 좋아서 좋으려고 만나는 것이지만, 성도의 교제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이 없다면, 복음에 대한 믿음, 복음에 대한 헌신이 없다면 성도들끼리 아무리 인간적으로 친하고 좋아도, 성도의 교제는 아직 그 자리에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직 친밀한 사이도 아니고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해 서로 나눌 수 있고 그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로 함께 뜻을 모은다면 그러한 교제는 성경적인 코이노니아입니다.
P)성경적인 코이노니아에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감사와 증거. P)먼저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의 간증, 은혜의 감사입니다. 복음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삶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셨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목장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감사를 나누는데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교제는 복음 체험을 나누기 위한 장입니다. P) 또한 복음 증거는 성경적인 코이노니아를 온전케 하는 두 번째 요소입니다. 목장 안에서 은혜의 체험을 서로 나누다 보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복음 전도를 위한 것입니다. 목장은 복음 전도를 위한 교제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의 기본 조직을 구역이라고 하지 않고 목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복음 전도를 위한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마음을 모으고 서로 격려하며 응원할 때에 그 곳에 성도의 코이노니아가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교제가 가능해집니다. P) 올해 우리 교회는 목장에서 함께 잃은 양 찾기에 헌신할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한 분들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또 한 때 교회를 다녔지만,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실망해서 가나안 성도로 살아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이 주님의 잃은 양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주변에서 그런 분들을 알게 하신다면, 목장에서 그런 분들을 품고 함께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성도의 교제는 복음의 열매일 뿐 아니라 복음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내게 허락하신 은혜의 열매는 다른 사람을 위한 복음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리면 기쁨으로 누군가 열매를 얻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에 자꾸 손 대지 마시고, 생명의 열매를 취하여, 그 복음의 씨앗을 받아 심으십시오.
둘째로, 성도의 교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는 일입니다. P) 3-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의 교제의 가장 신비한 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지 사람들이 서로 친밀함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의 교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는 기쁨이 됩니다. 인격적으로 경험한 복음의 은혜를 나누고 증거할 때에,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목장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런 떼제 공동체의 찬양이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 역사하는 곳에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지요. P)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공동체로 존재하십니다. P)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분(Lover), P) 성자 예수님께서는 사랑받는 분(Beloved), P)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랑(Love)이시지요. 사랑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교제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재현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고 흘러들어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때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초월해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랑받은 자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성도들이 하나님 사랑과 은혜의 경험을 나눌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P)하나님께서는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처럼 우리가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만찬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P)성냥팔이 소녀는 작은 성냥불을 밝힌 짧은 순간 환상 속에서만 행복을 상상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P)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P)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P)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성도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고, 식탁을 차리고, 설겆이를 하고, 새가족을 환대하고, 연약한 자를 돌보고, 성도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에, 우리는 우리 가운에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예배가 온전해지려면 수평적으로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에 시간과 마음을 드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위해 수고스러운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성도의 교제의 목적은 사랑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죄 고백을 나누는 일입니다(5-10절). 성도의 교제가 하나님의 교제가 된다는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가르침이야말로 세상적인 친목과 성도의 교제를 분명하게 구별지어 주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면 우리의 어두움이, 우리의 죄악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래서 성도는 죄 가운데 어둠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빛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에서 이루어지고 그 중심에 죄 고백과 사죄의 은총이 있습니다. 8-9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P)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자리에 죄가 없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신가요? 그렇다고 말씀하실 분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적으로 인간이 죄인임을 잘 아니까요. 그런데 스스로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경우들은 종종 있습니다. 어떨 때인가? 우리 마음에 현재 이런 상황을 만든데 책임이 있는 사람이 떠오르고 그 사람이 원망스러울 때입니다. 다른 사람이 인격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이 말을 잘못해서 이런 상황이 생겼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하지 억울한 생각이 들 때입니다. 그 때 우리 자신이 죄가 없다고, 적어도 죄가 그 사람보다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도 미움도 억울함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 성경이 지적하는 대로 우리가 죄가 없다고 스스로 속이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놀랍게도 우리가 죄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에, 죄의 책임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양심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죄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느라, 이러한 상황을 만든 사람을 미워하고 비난하느라, 우리 마음이 애쓰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케 한다고 하셨는데(요 8:32) 우리가 죄가 없다는 생각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과 시기와 원망과 억울함의 부정적인 감정에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진리가 역사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우리 죄가 하나님의 빛 앞에 드러나면, 이제 우리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죄는 우리 마음 깊숙이 숨어있고 우리 위선의 가면 아래 감추어져 있을 때는 강력하게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지만, 고백을 통해 드러나면 힘을 잃어버립니다. 대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빛이 우리를 비추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우리 수치를 덮어 주십니다. 죄 고백은 병의 치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가르칩니다. P)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현대 개신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하는 경건의 훈련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P) “내탓이오”(Mea culpa)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캠페인이 한 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해성사 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라고 가슴을 손으로 세 번 치며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사제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죄고백을 받고 용서를 빌어주는 형태의 고해성사는 개신교에서 인정되지 않지만, 성도의 교제의 일부분으로서 죄고백은 의미있는 경건 훈련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P) 예수님께서도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2-23).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고백교회 목사요 신학자로서 히틀러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순교한 디트리히 본 회퍼는 그가 섬긴 핑켄발트 신학교에서 섬긴 경험을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으로 남겼는데 죄고백의 의미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형제에게 죄를 고백하러 가는 것은 곧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인의 사귐에서 울려 나오는 부르심은 형제끼리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사귐에 이르는 길이 뚫리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을 사귐에서 떠나게 합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복음의 빛이 어두운 닫힌 마음 속으로 비쳐 들어옵니다… 이같이 그리스도인 형제 앞에 죄를 고백함으로 자기를 옳다고 주장하는 마지막 아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감추인 죄는 그를 사귐에서 유리시키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귐을 모두 거짓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고백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과 참으로 사귀는 자리에 이르도록 그를 도와 줍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십자가에 이르는 길이 뚫립니다….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새 생명에 이르는 길이 뚫립니다.”
처음부터 서로 죄를 고백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서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을 때 우리 죄를 고백하는 일이 점차 가능해질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뉴라이프교회와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제 뜻대로 목회가 안되는 상황이 벌어질 때 속상해 한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제 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믿음이 부족하고 순종이 부족한 것은 교인들이 아니라 목사인 제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고 설교해 왔으면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셨습니다. 제 생각과 뜻대로 목회가 안되어서 낙심하고 좌절하는데, 그것은 제가 예수님처럼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온전히 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기다려야 하는데 교인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는 제 모습을 보게 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결론) 노래 한 편을 소개함으로 설교의 결론을 대신하려고 합니다. 노영심씨가 작사 작곡한 ‘코이노니아: 우리 모두 선물이 된다’ 라는 곡입니다. 유튜브에 영상이 있는데 저작권상 예배 스트리밍 중에 틀 수는 없어서 가사와 소리만 들려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링크를 전교인 카톡방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 뉴라이프교회 성도들의 교제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생명의 빛이 되고 용서의 기쁨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코이노니아: 우리 모두 선물이 된다 (노영심 작사/곡)
당신에게 내 기도를 주고 싶어요.
푸르른 꽃씨 같은 사랑의 마음,
너와 나는 하나, 같은 꿈속에 피어
우린 모두 선물이 되죠.
당신에게 내 눈물을 주고 싶어요.
따뜻한 그 물결 같은 진실의 마음,
아픔 없이 줄 수 없는 엄마의 기도처럼,
아름다운 선물이 된다.
Koinonia Koinonia.
온 세상이 당신 숨결로 하나가 되어
Harmonia Harmonia.
온 마음이 당신 길 위에 빛이 되어,
당신 앞에 내 그늘을 내려놓아요.
잔잔한 그 빛으로 날 채워주지요.
더 깊은 곳에 세상, 더 큰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그대에게 내 눈물이 꽃씨가 될까.
그대에게 내 기도가 선물이 될까.
너와 나는 하나, 같은 꿈속에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된다.
Koinonia Koinonia.
나의 손이 너의 손 위에 하나가 되고
Harmonia Harmonia.
이 땅 위에 그대 평화가
Koinonia Koinonia.
온 세상이 당신 숨결로 하나가 되어
Harmonia Harmonia.
온 마음이 당신 길 위에 빛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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